「아카데미 백제」 제1회 콜로키움 '백성의 나라를 꿈꾼 무령왕' 성황...

세종시 비암사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불비상’ 등 백제 유민과 관련된 유적 정재윤 교수 ''백제가 추구한 가치와 이상을 새기면서 세종의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보자''

서서희 기자

2025-11-02 15:48:03

10월 31일 세종시 운주산성 내 고산사 삼천당에서는  「아카데미 백제」 제1회 콜로키움 '백성의 나라를 꿈꾼 무령왕'이 열렸다.  

 

 

이번 콜로키움 개최를 위해 백제학회의 전임 회장(양기석, 노중국, 임영진, 정재윤, 권오영, 성정용, 김기섭)들과 백제사 대중화 및 학계 전문성을 제고하기 위한 단체인 ‘아카데미 백제’가 결성하였다. 또, 단체 대표는 정재윤 공주대 교수가 맡아 김기섭 전 경기도박물관장과 함께 운영을 전담한다.

이날 정재운 공주대 교수는 '백성의 나라를 꿈꾼 무령왕' 특별 강연을 진행했다. 

백제가 추구한 가치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문헌과 고고학적를 통해서 접근이 가능한 백제 25대 무령왕이 적격이다. 일종의 백제 관문인 셈이다. 

이에 무령왕의 일대기를 재구성하기 위해서 총 4장으로 목차를 구성하였다. 

출생의 비밀과 성장 과정을 추적한 ‘탄생과 성장’, 이복동생인 동성왕이 시해되자 그의 대안으로 추대되어 권력을 거머쥔 ‘국인공모(國人共謀)’, 백성의 나라를 실현한 실천형 지도자의 모습을 그린 ‘갱위강국(更爲强國)’ 등 무령왕의 일대기를 전반부에 강연하였다.

마무리로 무령왕릉의 발굴이 가진 의미를 다룬 ‘백제사의 역주행’으로 청중의 호응을 유도한 후 1시간에 걸쳐 질의와 응답 시간을 통해 무령왕에 대한 궁금증 해소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앞으로의 진행 방향과 바람 등 여러 요청 사항도 청취하여 성황리에 마무리할 수 있었다.

50여 명의 청중이 모였으며, 김기섭 전 경기도박물관장의 매끄러운 진행도 돗보였다. 주요 내빈으로는 초대 백제학회 회장을 지낸 양기석 교수(충북대 명예교수), 최병식 주류성 출판사 사장, 조상호 전) 세종시 경제부시장, 장인성 충북대 명예교수, 임준묵 한밭대 부총장, 일우 신원사 불교대학 강주 스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이 자리를 빚내 주었다. 

정재윤 공주대 교수

무령왕은 고구려와의 결전이 임박한 461년 일본의 한 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곤지는 왜의 심장부인 기내 지역에 들어가 백제계 이주민들을 규합하여 유사시에 왜의 구원을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반면 왜로 가는 도중 태어난 무령은 가카라해의 한 섬에 남아 성장하였다. 당시 많은 백제인들이 전란을 피하여 왜로 이주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왜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져 등용된 덕분에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한 반면 다수의 사람들은 왜에서 많은 고생을 하였으리라 짐작된다. 

낮선 이방인들을 경계한 왜인들의 질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를 목도한 무령은 고국을 떠나 외지에서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동포들에게 한없는 연민을 느꼈다. 다시는 이런 아픔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문제는 백성들이 나라를 떠난 그 자체에서 발생하였다고 생각하며, 이들을 위한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희망하였다.  

무령이 고국인 백제에 귀국하여 혼란의 종지부를 찍은 동성왕의 즉위에 일조한 것도 이러한 염원을 위한 실천의 첫 걸음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카리스마를 배경으로 왕권을 강화한 동성왕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급급하고, 민심을 거슬리며 탐욕을 드러내자 그의 고민은 깊어져갔다. 

이복동생인 동성왕의 대안으로 그가 거론되며 결단의 순간이 임박하였을 때는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를 맞이하였다. 혈육의 정과 백성이 살만한 나라,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루하루 입장이 바뀌고, 또 각오를 되새기는 과정을 거치며 고민의 폭이 깊어질수록 또렷하게 어릴 적 이국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백제인들의 참상이 떠올랐다. 내가 아니면 백성들은 여전히 힘든 삶을 살 것이다. 

단언컨대 나는 권력자인 왕이 아니라 백성이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지렛대 역할을 하겠노라고 다짐하였다. 백성의 나라를 향한 열망은 그가 왕이 되고 나서 어려운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항상 되새기는 시금석이 된 것이다. 

실제 무령은 왕이 되고 나서 머릿속의 생각을 하나하나씩 실천해 나갔다. 춘궁기에 백성들을 구휼하는 것은 임시방편일 뿐 이들이 근본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국가가 주도하여 제방을 축조하고, 땅을 개간하여 떠도는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든 것이다. 

발 없는 소문이 천리를 간다고, 반신반의하던 유망한 백성들이 백제 땅으로 돌아오자 백제는 풍요의 땅이 되었다. 

호적이 없어진 이들을 다시 백제의 백성으로 편입하면서 국가의 역량은 놀랄 만큼 커졌다. 백성의 증가는 세수의 증대로 이어져 나라가 부유해지고, 군사 수가 늘어나면서 고구려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전력을 갖추었다. 무령왕이 재위 21년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수차례 격파하여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고 선언한 것은 이러한 실천의 결과였던 것이다.    

백제의 국호는 ‘백성 百’자에 ‘따를 濟’자이다.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 한 지향점을 몸소 실천한 것은 바로 무령왕이었다. 또한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 하는 모토는 백제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검소를 기본으로 하면서 누추하지 않는다는 것은 소박한 문화를 지향한 것이며, 화려하되 사치롭지 말아야 된다는 것은 절제된 품격높은 문화를 말한다. 

왕과 귀족이 백성을 배려하여 더불어 사는 세상을 지향한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다. 그는 시대를 앞선 선구자이다. 백제의 정신과 문화가 오늘날 더욱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은 바로 무령왕이 꿈꾸었고, 몸소 실천한 백성의 나라에서 비롯된 것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출발한 세종시의 역사는 일천하다. 그러나 세종시가 백제의 웅진 천도를 이끈 배후도시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나성동에 백제의 지방도시가 들어서고, 최근 사적으로 지정된 한솔동고분군을 만든 집단이 이들이라고 보는 것은 일반적이다. 

백제의 웅진 천도가 가능했던 것은 금강을 통제한 나성동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백제 멸망 직후인 673년 연기 비암사에서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불비상’ 등 백제 유민과 관련된 유적도 발견되었다. 

이를 백제 유민들의 부흥운동의 염원과 관련시켜 보기도 하는 의견이 학계에서 제기되었다. 백제 부흥운동을 기리기 위한 ‘백제대제’가 이곳에서 열리는 것도 우연히 아니다. 이처럼 세종시는 1500년 전 백제와 관련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역사문화도시로서도 자리매김할 수 있다. 

백제가 추구한 가치와 이상을 세종시에서 실현시킨다는 것은 이제 우리 지역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제시하는 또 다른 걸음이 될 것이다. 뚜벅뚜벅 백제를 새기면서 세종의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보자   

다음 강연은 11월 27일(목)이며, 주제는 ‘동성왕과 무령왕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을까?’(강연자: 김기섭 관장)이다. 역사문화의 불모지 세종에서 처음 열리는 백제사 대중 강연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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